종친회 인명

종친회 인명

역대인물

신구 [信龜, 1633~1685]
작성자장수황호안공파(hwgej@naver.com)작성일2022-10-13조회수779
파일첨부 c798efd466b992a492165726ccedad0d.jpg

* 생몰년 : 1633(인조 11) - 1685(숙종 11)
* 자 : 석여(錫汝)
* 호 : 운계(雲溪)
* 관직 : 참봉
* 세계 : 석부-균비-군서-희-치신-사효-개-윤공-진-정열-위-신구(12세)

총기가 뛰어나 어려서부터 고인들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관심을 갖고, 날마다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등 성리학 제서를 암송하며 아플 때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전 연구에 힘써 《내성록(內省錄)》을 저술하였으며, 성현의 본뜻을 밝히고 선유의 제설을 상고하여 《소학회의(小學會疑)》·《용학차의(庸學箚疑)》·《예의문답(禮疑問答)》등을 저술하였다.

1673년(현종 14) 남인(南人)들이 
자의대비 2차 복상문제로 장기(長?)에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을 예률(禮律)로써 종묘(宗廟)에 보고하려 할 때, 호남 유생들의 위촉으로 주자(朱子) 설을 근거로 하여 송시열(宋時烈)을 옹호하고 남인들의 잘못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경행(經行)으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에는 벼슬에 뜻을 접고 후학을 가르쳤는데 배우려는 자들이 많았다.

1675년(숙종 1) 대신(大臣)이 추천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김지백(金之白)·유진석(柳震錫)·최시옹(崔是翁)·이문재(李文載)·윤구(尹?)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문집으로 《운계집(雲溪集)》이 있다. 남원(南原) 고암서원(高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전글 혁[赫, 1551~1612]
다음글 엽[曄, 1666년∼173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