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회 인명

종친회 인명

역대인물

정욱[廷彧, 1532~1607]
작성자장수황호안공파()작성일2022-08-31조회수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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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 : 1532(중종27)∼1607(선조40)
* 자 : 경문(景文)
* 호 : 지천(芝川)
* 시호 : 문정(文貞)
* 관직 : 대제학
* 세계 : 석부-균비-군서-희-치신-사장-섬-기준-열-정욱(10세)

오위장 열(悅)의 아들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 (史官)이 되고, 정언(正言), 응교(應敎), 문학(文學), 집의(執義)등을 역임,
1580년(선조 13) 진주목사 (晋州牧使)를 거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辦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 사명을 완수하고 개정 간행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확인한 후 돌아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승진했다.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지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승진, 이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전임되고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弘文館 藝文館 大提學)에 겸임제수(兼任除授)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 보(?)를 배종(陪從)하여 강원도에 들어가 의병(兵)을 소집하는 격문을 8도에 돌렸으며,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會寧)에 들어갔다가 모반자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임해군(臨海君) 순화군 두 왕자와 함께 잡혀 안변(安邊) 토굴(土窟)에 감금되었다.

포로로 있을 때 왜장(倭將) 가또오(加藤淸正)로부터 선조(宣祖)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쓰라고 강요를 받고 이를 거부했으나 그의 손자와 두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고 아들 혁(赫)이 대신하여 썼다.

이에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한 장의 글을 썼으나 이를 입수한 제찰사가 항복 권유문 만을 보내고 다른 한 장은 묵살함으로써 이듬해 부산(釜山)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 앞서의 항복 권유문 때문에 반대파인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

1597년 석방되었으나 복관(復官) 되지 못한 채 죽었다. 뒤에 신원(伸寃)이 되었다. 문장(文章) 시(詩) 서예(書藝)에 능했다.

 

저서로는 《지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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