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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인물이야기
작성자관리자(hwgej@naver.com)작성일2022-10-12조회수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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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 인물이야기 (1)

지천 황정욱의 생애와 문학


조선시대의 많은 문인 학자 가운데 관각삼걸(館閣三傑)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호음(湖陰정사룡(鄭士龍)과 소재 (?齋노수신(盧守愼), 그리고 지천(芝川)황정욱(黃廷彧)이다관각이란 홍문관· 예문관·규장각을 아울러 일컫는 말인데주로 문학에 관한 일을 맡았으며특히 임금의 사명(辭命)이 사대교린(事大交隣)의 표전 (表箋)을 전담하였다여기에 종사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시문에 뛰어난 인재로위 세 사람을 꼽았으니여기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품격 있는 문인으로서 위상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지천의 시조는 휘 경()으로 신라(新羅때 시중이었고그 후로 사대부(士大夫)가 끊이지 않았다익성공(翼成公휘 희()는 중시조가 되었고그 아들 휘 치신(致身)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인데다섯 아들이 급제한 은전(恩典)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휘 사장(事長)과 휘 섬()은 모두 무계(武階)로 현달(顯達)하였고휘 기준(起峻)은 생원(生員)으로 별좌(別坐)에 이르고휘 열()은 부호군(副護軍)인데이상이 바로 지천의 고조·증조·조부·아버지이다어머니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인데공의 영귀(榮貴)로 3대가 모두 전례에 따라 추증되었으며부인 조씨(趙氏)도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지천은 1532(중종 27)에 태어나 27세 때인 1558(명종 13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다승문원예문관시강원종부시군자감사복시통례원군기시장악원예빈시호조예조병조사간원사헌부홍문관성균관 등에서 근무하였고호조와 병조에서는 판서를 지냈다외직으로는 해미현감청홍도 도사충청감사 등을 지냈다. 1580(선조 13)에는 진주목사로 제수되었는데가는 도중에 병이 심해져서 부임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1583(선조 16)에는 정시에서 장원을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자급(資級)이 더하여졌다.

 

1584(선조 17)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는데이 때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수정하려 하는 전문을 기록하여 보여준 황제의 칙서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그 후 1589(선조 22)에 윤근수(尹根壽)가 대명회전 전질과 칙서를 받아가지고 돌아오자전후 봉사(奉使)한 사람 중에 공로가 있는 자를 녹훈하였는데지천과 유홍(兪泓윤근수가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고지천은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으로 책봉되었다그러나 이 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투를 받기도 하였다.

 

1591년 7월에 지천 부자가 탐욕을 부리고 유근(柳根), 윤두수 등과 함께 정철(鄭澈)에게 붙어 사람을 해쳤으니 파직하고 처벌하라는 양사의 합계가 올라왔다선조가 황정욱 부자는 사실일 수 없다 하여 파직을 윤허하지 않고 체직만 시켰는데양사에서 끈질기게 계를 올려 결국 파직시키고 말았다그러고 나서 11월에 다시 서용하였을 때 녹봉을 소급해서 지급하라고 했는데사헌부에서 법례에 어긋나는 일이니 명을 거두라고 를 올렸다그러자 선조는 말했다. “녹봉을 소급하여 지급하라는 특명은 그가 훈신이기 때문이다구구하게 논계하니 너무 자질구레하지 않은가일을 당할 적마다 반드시 규례만을 말한다면 일개 서리(胥吏)와 장부만 있으면 천하의 정치도 충분히 할 수 있겠구나그러나 이미 논계했는데 그대로 둔다면 영화로움이 아니라 곧 욕이 될 터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고 한 발 물러섰다임금의 처지에서 융통성을 조금도 발휘할 수 없음에 대해 매우 답답해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났을 때는 지천 부자가 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신하였다순화군은 선조와 순빈김씨(順嬪金氏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지천의 장남 독석(獨石황혁(黃赫)의 딸과 혼인하였다지천 일행이 회령부에 이르렀을 때 국경인 등 반적에게 붙잡혀 왜장 가등청정(加?淸正)에게 넘겨졌다이 때 지천의 여덟 살 난 증손자는 왜적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1592년 10월에 지천은 적장의 강요에 의해 임금에게 강화(講和)를 권유하는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왜적이 보는 앞에서 쓰면서 그것이 자의에 의해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도록 ()’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일부러 난잡하게 작성하였다그리고 별도로 장계를 하나 작성하였는데그것은 격식에 따라 쓴 것으로 잔글씨로 써서 비밀리에 전달하려고 하였다그것이 당시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막하를 통해서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에게 전달되었는데체찰사는 지천의 장계와 왕자의 여러 편지를 다 없애버리고 아뢰지 않았고다만 지천의 가짜 편지만 다시 베껴서 전달하였다만일 가짜편지의 원본을 전달하기만 했더라도 그것이 가짜로 쓴 것임을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지천의 주장이었다그런데 체찰사는 장계의 내용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원본은 남겨두고 사본을 만들어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 장계를 받아 본 선조는 대단히 화가 나서, 1593년 6월에 지천이 돌아오게 되자즉시 잡아다 추국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땅을 분할해 주고 강화(講和)하기를 권하는가 하면흉적에게 애걸하여 뇌물을 바치고서 빠져 나오기를 계획했으며심지어 적의 뜰에서 무릎을 꿇고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다행재소에 글을 올리면서 ()’자를 쓰지 않았고 적추(賊酋)를 전하(殿下)라고 칭하였다아무리 적의 위협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신하의 의리는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이제 왕자를 버려둔 채 먼저 탈출해 왔으니그 정상을 헤아리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 선조가 내린 전지의 요지였다그러나 지천의 진술에 따르면 이러한 혐의는 모두 억울하게 덮어쓴 것이었다왕자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땅을 분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였고뇌물을 바쳤다는 것도 무릎을 꿇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또 장계에 자를 쓰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포로로 있는 사람이 가짜 편지 속에 자를 썼다가 뜻밖의 근심거리를 불러올 수 있어서 전후의 가짜 편지에 모두 자를 쓰지 않았다고 하였고적장을 관백전하(關白殿下)라 일컬은 것은 적도(賊徒)가 자기 임금을 지칭하여 부르는 대로 썼을 뿐이며실제로 조선에서 보내는 외교문서에도 그렇게 일컬어 왔던 것이었으니다른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추국을 받게 되었는데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홍문관이 모여 추국을 하고서 지천을 형추(刑推)하자고 하였다그러나 선조는 차마 죽일 수는 없으니 멀리 귀양을 보내라고 하였다이 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 달 열흘 동안 거의 매일같이 율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는 계를 올렸는데선조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그리하여 오히려 대간들이 체차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도 지천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1595년 1월에는 사헌부에서 지천이 귀양 가 있으면서 작폐를 저질렀다는 계를 올려 처벌을 주청하였다선조가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으나 양사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지천을 서울로 압송하여 삼성(三省)에서 추국하게 하였다그리하여 다시 지천을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기로 하였는데양사에서는 집요하게 정죄를 청하였다이 때 우의정 정탁(鄭琢),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 판중추부사 최흥원(崔興源), 좌의정 김응남(金應南등이 지천을 두둔하여 더 이상의 국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596년 8월에 선조는 지천이 오래 된 신하이고 공신으로 책봉 된 사람이니 시골로 놓아 보내라고 전교를 내렸다그러자 다시 양사(兩司)에서 들고 일어나 명의 취소를 청하니선조는 어쩔 수 없이 4일 만에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거두었다그러다가 이듬해인 1597년 2월에 순화군의 처 황씨가 대가(大駕)앞에서 상언한 계목(啓目)의 판부(判付), “황정욱은 공훈이 있는 구신으로서 여러 해를 안치했고또 대사(大赦)가 있었는데 지금 거의 죽게 되었고이미 사면령을 내렸으니 방면하라.”고 하였다양사를 비롯한 여러 간관들이 이번에도 약 3개월여에 걸쳐 극력 반대를 하였는데선조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그리하여 드디어 1597년 5월경에 유배가 풀렸다그러나 선조는 삼사의 요구를 참작하여 도성에 드나드는 것은 제한하였다이에 지천은 ?사몽은전(謝蒙恩箋)?을 올려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1599년 6월에선조는 도승지에게 광국공신 황정욱이 황해도 내에 있다고 한다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할 것을 황해감사에게 하서하라.”라고 전교를 내렸다지천은 ?사사식물전(謝賜食物箋)?을 올려 감사의 뜻을 표했다그 후 경기도로 옮겨온 뒤에 선조는 여러 차례 음식을 하사하였고질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의약을 보내 주기도 하였다.

 

1600년 8월에 군자감 부정 윤인백(尹仁伯)이 상소를 올렸다그 글에 이른바 위서(僞書)’라고 하는 것은신들이 올 때도 두 건을 받아왔는데 그 하나는 왜적이 눈으로 보는 곳에서 난잡하게 써 보인 것이고또 하나는 격식에 따라 잔글씨로 써서 비밀히 장계한 것으로신은 면전에서 그 뜻을 받들었으므로 능히 진짜와 가짜를 살펴서 전했던 것입니다그런데 그 후 위서가 전달된 것은필시 전하는 자가 망령되게 전하고 보는 자가 잘못 보고서 위서를 진짜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상소에서 윤인백은 황정욱 부자가 쓴 진위의 두 편지를 자신이 직접 보았으며 그 중 거짓편지만이 조정에 전해졌다고 진술하여 지천 부자의 무고함을 밝혔다선조는 이 상소를 의금부에 내려 보냈는데의금부에서는 사안이 중대하여 아래에서 논의하기 어려우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하였다그리하여 영중추부사 최흥원(崔興源), 해원부원군 윤두수영돈녕부사 이원익(李元翼), 판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김명원(金命元등이 모여 논의를 하였는데대체로 적에게 함락된 지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억측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이런 의논을 입계하자 선조는 단지 ()’자만 찍고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이듬해인 1601년에 함경도 관찰사 신잡(申?), 윤근수 등이 지천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고그 다음해인 1602년 7월에야 선조가 황정욱(黃廷彧)은 연로한 원훈(元勳)이니 방송(放送)하도록 하라.” 하는 전교를 내렸다그러나 이번에도 양사에서 끈질기게 석방 취소를 요청하여 보름 쯤 지난 후에 결국 석방 명령을 철회하였다그리고 또 그 이듬해인 1603년 6월에 석방을 명하였는데양사의 반대로 열흘 만에 다시 석방의 명을 취소하였다그러던 중에 1606년 5월에 지천은 아들 황혁을 일본에 갈 사신으로 선발해 달라고 요청하는 소를 올렸다이 때 윤근수가 지천 부자의 방환을 요청하였는데선조는 임금 마음대로 하기 어렵다고만 비답하였다그런데 이를 두고 삼사에서 지천 부자를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윤근수를 탄핵하였다.

 

결국 지천은 한 번 죄망에 걸려든 후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1607년 8월 14일에 생을 마감하였다지천이 별세한 이듬해에 끝까지 지천을 지켜주던 선조도 훙서하였다지천이 별세할 때 관직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부의를 하지 않았는데광해군 6(1614)이 되어서야 훈신을 접대하는 충훈부(忠勳府)에서 계를 올리니 별치부(別致賻)로 하라고 전교를 내렸다그리고 인조 2(1624)에 지천의 현손 황이징(黃爾徵)과 황부(黃?홍명일(洪命一등이 소를 올려 신원(伸寃)을 요청하였다인조는 그 소를 금부에 내리니 판부사 이정구(李廷龜)와 김류(金?),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등이 모두 지천을 복관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그리하여 죄망에 걸린 지 30여년 만에 비로소 관작이 회복되었고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그리고 다시 100여년이 지난 1741년 8월에 영조로부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하사 받게 되었다지천은 처음에 파주의 한강 가에 장례를 지냈다가, 1612년에 교하(交河)의 금승리(金蠅里)로 이장하였다.

 

1652(효종 3) 5월에 지천의 외손자 이후원(李厚源)이 차자를 올리면서 지천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선조의 어필 인본(御筆印本두 점을 바치니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그 어필은 지천을 석방하여 시골로 돌아가게 했을 때 지은 두 편의 시로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해의 풍진이 어두웠던 때 瀚海風塵暗

고생하며 보호한 공이 있었다. 間關保護功

부끄럽게 나의 마음 알리지 못해 愧予情未報

원통한 그대 눈물 먼저 붉도다. ?子淚先紅

세상일은 뜬 구름 밖의 것이요 世事浮雲外

외딴 성은 가시나무 쌓인 속에 있도다. 孤城疊棘中

시비가 정해질 때 있을 것이니 是非應有定

끝내 도로 부르지 않을까보냐? 還?豈無終

 

한 번 떠나 속마음 드러내기 어려워 一別幽懷未易開

호연히 자릉대(子陵臺)에 한가하게 누웠구려. 浩然閑臥子陵臺

본디부터 벼슬길은 구당협(瞿塘峽)처럼 험하거니 從來宦海瞿塘險

사람들이 거짓을 말해도 한탄하지 마시오. 莫恨人言市虎來

 

선조는 지천의 공을 잊지 않고 있으면서언젠가는 다시 불러들일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또 한나라 때 광무제의 친구였던 엄 자릉(嚴子陵)이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하면서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던 고사를 인용하면서지천을 위로하고 있다.

 

지천 사후에 신도비명은 손녀사위인 홍서봉(洪瑞鳳 1572~1645)이 썼는데, 1624년에 지천의 관작이 회복된 직후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많다묘지명은 지천의 외손 이후원의 부탁을 받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썼는데이후원이 작고하기 직전에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 묘지명을 쓸 때 선조의 시를 넣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1660년에 이후원이 별세한 이후로 2년이 지난 뒤에 묘지명이 완성되었다시장(諡狀)은 월곡(月谷오원(吳瑗 1700~1740)이 썼는데시호를 받은 것이 1741년이므로그 전 해쯤에 오원이 별세하기 직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지천의 문집은 인조 10(1632)에 간행되었다지천이 저술한 것은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는데맏아들 황혁(黃赫)이 모아들여 간직하였다그러나 1612년에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晉陵君)이 왕으로 추대되어 일어난 옥사 때 황혁도 연루되어 형신을 받다가 옥사하고가지고 있던 문서와 서적은 모두 금부에 압수당하고 말았다후에 궁중에서 옛날 종이 몇 묶음이 발견되었는데어떤 사람이 그 중에 지천의 원고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지천의 사위 이욱(李郁))에게 알려이욱이 비싼 값을 주고 그것을 얻어 기록하였다그리고 이욱의 아들 李厚源이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유고를 간행하게 되었다이후원은 ?지천집의 간행에 즈음하여 ?지천연보(芝川年譜)?도 정리해 두었다또 지천의 신원을 위해서도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몇 차례 올린 상소문은 모두 그가 쓴 것이었다또 지천의 사위 홍서봉이 쓴 신도비문을 비에 새겨 세우는 것도 이후원이 비용을 마련하였고따로 돌을 하나 구해서 직접 지은 음기(陰記)를 새겨 묘 앞에 세웠다선조가 하사한 어제시를 돌에 새겨 두고임종에 즈음해서 송시열(宋時烈)에게 편지를 보내 묘지명을 지을 때 그 내용을 넣어 달라고 부탁하였다실제로 송시열이 지은 지천의 묘지명에는 선조의 어제시가 온전히 실려 있다지천이 후세에 전해지고 빛을 보게 된 것은 외조부를 지극정성으로 챙긴 이후원의 공이 크다 하겠다.

 

지천집에는 1권과 2권에 지천이 지은 시 166제 194수의 시가 실려 있고, 3권과 4권에는 지천의 산문 32편이 실려 있다. 5권과 6권은 부록으로 지천의 행장과 제문만시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이 지은 글이 다수 실려 있다이 외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보고들은 것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라는 선조의 명을 받아 지은 조천잡의(朝天雜儀) 세 권이 있었는데난리 통에 올리지도 못하고 없어지고 말았다.

 

지천은 시 중에서도 특히 칠언율시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았다문집에 실린 칠언 배율 한 수는 1583년 정시(庭試)에서 장원한 작품이다장유(張維)와 홍만종(洪萬宗)은 지천의 시를 횡일기위(橫逸奇偉)’라는 말로 평하였고김창협(金昌協)은 교건기굴(矯健奇?)’이라는 말로 특징 지웠으며이의현(李宜顯)은 경발(勁拔)’이라는 말로 정의하였다대체로 시의 기운이 부드럽거나 평범하지 않고굳세고 기발하다는 것이다성혼(成渾)은 지천의 시를 두고, “경술(經術)에서 발해서 자득으로 완성된 것으로의리를 담은 글이다마땅히 점필재(?畢齋김종직(金宗直)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며호음(湖陰정사룡(鄭士龍)이나 양곡(陽谷소세양(蘇世讓)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허균(許筠)은 조위한(趙緯韓)이 엮은 황지천시권(黃芝川詩卷)?에 서문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젊은 날 지천 어른을 뵙게 되었는데 그 지론이 몹시 거만하여 고금의 문예를 이야기함에 허여하는 바가 적었고우리나라의 시에 대해서는 더욱 논란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이를테면 용재(容齋이행(李荇같은 이는 너무 기름지다고 하고이달(李達)은 모의(模擬)했다고 지적하니그 아래는 대개 알 만하다오직 눌재(訥齋박상(朴祥)만은 높이 받들어 미칠 수 없다 하였고호음(湖陰정사룡(鄭士龍)과 소재(蘇齋노수신(盧守愼)은 어느 정도 작가라고 할 만하고 하였다나는 듣고 마음속으로 놀랐으며드넓은 강물을 엿본 듯하여 그 깊이와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러나 나 혼자 속으로만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공이 돌아가신 뒤에 남긴 글을 훑어보지 못하여 늘 아쉬웠고그 지은 것이 과연 논한 바와 들어맞는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그런데 나의 벗 조위한이 그 근체율시 1백여 편을 모았으므로 나는 비로소 직접 보게 되었는데그 뻣센 긍지와 웅숭깊고 드넓음은 바로 천년 이래 빼어난 울림이었다그 변화한 바를 고찰해 보면 대개 눌재(訥齋박상(朴祥)에서 나왔고 노수신과 정사룡의 사이를 넘나들어 거의 그 물결을 같이하나 더욱 뛰어난 것이었다나는 이를 보고야 비로소 그 논한 바가 과연 저술한 바에 합치하여 헛말이 되지 않음을 알았다기이하도다.”

 

신흠(申欽)은 ?청창연담(晴窓軟談)?에서, “황 지천은 문장에 조예가 깊었다그 시구에 이르기를, ‘평생토록 부질없이 시골로 돌아가는 게 좋다 하면서반평생을 오히려 ?행로난(行路難)?을 노래했네.[平生漫說歸田好半世猶歌行路難.]’라고 하였으니뜻이 매우 격렬하다.”라고 하였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에서 지천의 시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천이 젊어서 옥당에 있을 적에 이순인(李純仁최경창(崔慶昌하응림(河應臨등이 모두 당운(唐韻)을 좋아하여대궐 안에 있는 작은 복숭아나무를 읊었는데작품이 매우 많았다공이 화답하기를, ‘무수한 궁궐 꽃이 꽃 담장에 기댔는데노니는 벌 나비가 남은 향을 따르네노옹은 봄바람을 미처 보지 못하고공연히 그리는 맘 해를 향해 서 있네.[無數宮花倚粉牆游蜂?蝶?餘香老翁不及春風看空有葵心向太陽.]’라고 하였다함축된 뜻이 심원하고 단어의 사용이 기발하니시를 지으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풍월과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도리어 그 중후함을 해치게 된다.”

 

김득신(金得臣)은 ?평호소지석시설(評湖蘇芝石詩說)?에서,

 

대개 호음은 침착하여 오칠언 율시에 뛰어났으나 절구와 배율혹은 가행(歌行)에는 약했다소재는 웅혼하여 칠언율시와 오언배율에 뛰어났으나 칠언율시는 때로 부족한 부분이 있고오언율시와 절구그리고 가행에는 약했다지천은 기건(奇健)하여 칠언율시와 배율에 뛰어났으나 절구와 가행에는 약했는데시를 깨달아 본령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그러나 호음·소재·지천 중에 지천의 시가 좀 더 정밀하고호음의 시는 정밀하지 않다소재의 시는 그저 크기만 하고 잡스러워 나는 취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관각삼걸 중에서도 지천의 시를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장유(張維)는 ?지천집서?에서 도당(都堂)에 올린 편지는 필력이 웅건하고 분방하여이 한 작품만으로도 전체 작품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 하여지천의 산문 중에서도 ?상도당서(上都堂書)?를 대표작으로 꼽았다?상도당서?는 양적으로도 다른 작품에 비해 월등할 뿐만 아니라지천이 순화군을 모시고 피난을 갔다가 죄망에 걸려들게 된 내력과 실상을 차분히 설파한 것으로지천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지천은 경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학문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선조 때 지천이 매번 경연(經筵)에서 이치에 의거 사건을 논의하였는데 말은 간략하여도 의사가 명백하므로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다노수신(盧守愼)이 동료들에게 자주 칭찬하기를, “참된 강관(講官)의 재목이다.”라고 하였고이이(李珥)는 일찍이 옥당의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신군(辛君辛應時)은 우두커니 앉아서 글을 읽지 않으니 그 재주가 퇴보하는데경문(景文지천)은 한 마음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니 재주가 날로 진보하여 당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기대승(奇大升)도 배우는 이들에게, “내 너희들을 위하여 훌륭한 스승을 얻어 놓았으니훗날 서울에 가거든 집지(執贄)하고 가르침을 청하여라.”라고 하였다모친상과 부친상을 연달아 당하여 6년 동안 거상을 할 때도 공부를 그만두지 않고특히 제가(諸家)를 탐구하여 성력(星曆), 감여(堪輿), 의약(醫藥), 복서(卜筮같은 책에 모두 정통하였다.

 

지천은 특히 예악(禮樂)에 밝아서 고금의 상변(常變)에 정통하였다조정에 있으면서 예악에 대해 논하면 아무도 논난을 벌이지 못하였다선조 11(1578)에 사당에서 큰 제사를 지내면서 국상이 아직 끝나지 않아 축문에 애자국왕휘모(哀子國王諱某)’라고 칭하자지천이 상소를 올려, ‘효손(孝孫()’라고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선조가 그 소를 내려보내 상의하게 하니예관이 대신들과 상의하여 보고하기를예전부터 관습적으로 해 오고 고치지 않은 것이 아무개가 논한 바와 꼭 같습니다.”라고 하였다이때부터 ()’자를 쓰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또 선조 때 종묘에서 사용하는 음악이 왕에 따라 제대로 구분되지 않은 것을 두고 지천이 종묘에 제향하는 악장은 국초에 사신(詞臣)이 지은 것만 가지고 역대 임금들의 신위에 연주하고 있는데그 행사와 업적이 각기 달라 서로 맞지 않으므로 혼령을 강림하게 할 수 없습니다. 1()마다 각각 한 악장을 지어 혼령을 편안하게 하소서.”라고 건의하였다선조가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실제로 각각의 악장을 만들지 못하여 시행되지는 못하였다지천이 이렇게 예악에 밝았기 때문에 후대에 송준길(宋浚吉같은 예학의 대가도 종묘의 음악에 관한 일은 지천의 주장에 유의하여 일을 처리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천은 영욕이 교차된 삶을 살았다과거에 급제하고 정시에서 장원하였으며經筵에서 임금을 보필하고 문형을 잡았다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그릇된 宗系를 바로잡아 공신에 녹훈되고 부원군으로 책봉되기까지 하였다그러나 공신으로 책봉된 지 불과 4년 만에 죄인의 몸이 되어 의율정죄하라는 대간의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선조는 지천에 대해 자기의 공신이 아니라 선왕의 공신이라고 여겨 끝까지 보호해 주는 의리를 지켰으니그런 정성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끝내 관작을 회복하지 못하고 향년76세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그로부터 6년 후 에는 고락을 같이 했던 장남 혁()이 옥사에 걸려 형신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으며손자 곤건(坤健)과 증손자 상()도 함께 화를 당했고지천의 형 정식(廷式)에게 양자로 들어간 차남 석()도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가 전라도 흥양(興陽)으로 이배되어 배소에서 생을 마쳤다손자 곤후(坤厚)도 24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고坤健의 맏아들은 여덟 살의 나이로 일찍이 피난 중에 왜인에게 책살(?殺)당했으니온전히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는 지경이었다그렇게 철저히 몰락하였다가 지천 사후 18년이 지난 뒤에야 현손 등의 상소로 관작이 회복되고, 100여년이 지난 후에 시호를 받기에 이르렀으니사후에도 영욕이 교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천의 문학세계는 그의 타고난 재주와 끊임없는 연마로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며급기야 나라의 사령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지천 이후의 많은 문인 학자들이 지천의 시문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았으며특히 지천의 시세계는 굳세면서도 기발하여 관각삼걸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그 밖에 경학과 예악에 대한 조예도 주위의 인정을 받았으니지천은 학문과 문학 방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오늘날에도 지천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으며앞으로도 지천의 진가를 발견하기 위한 연구는 계속될 것으로 믿는다.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傍孫 ?義洌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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